New 『코리안 하이웨이』 4. 풀이 자란다
4. 풀이 자란다“너 남산이구나? 나는 웬 스님이 앉아 있나 싶었어. 물론 여기 계셔도 이상할 건 하나 없겠지만.” 비둘은 갑자기 자신에게 날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새처럼 두 팔을 어쩔 줄 모르고 퍼덕이며 환하게 웃었다.“나 만져 봐도 돼?” 구리가 허락은 관심이 없다는 듯 우선 손을 뻗었고 남산이 손목을 낚아챘다. “막으니까 꼭 소림사 같아. 그새 쿵푸라도 배운 거야? 혹시 모르니까?” 구리가 천적과 마주한 사마귀처럼 두 팔을 꺾어 치켜들고 흔들었다.“소림사는 절 이름이고.” 남산이 정정하는데 머리와 수염이 덥수룩한 덩치가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어 익숙한 얼굴들을 살피더니 반색하며 들어왔다. “오랜만입니다, 여러분.”“삽살이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얼마 전까지는 잘 지냈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아니었고요.” 그건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수리에서 둥글게 묶은 희끗한 머리에 비녀를 꽂고 아직도 다 헤지지 않은 검은 도복 차림의 거북도 그랬고 탈색한 김에 초록색으로 염색을 하고 싶었지만 사정이 이렇다보니 파란색으로 색칠했다는 족제도 그랬다. 라니는 그냥 삭발을 해보고 싶었는데 색안경을 끼니까 잘 어울려서 좋다고 말했다. 한 명 한 명 들어올 때마다 백변은 조금 놀랐지만 다년간의 경력을 통해 능숙하게 안면 근육을 흔들림 없는 엄중한 모양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올 사람이 다 온 것 같다고 하길래 논의를 막 시작하려던 차에 웬 방금 전에 실험에 실패한 것 같은 머리를 브로콜리처럼 묶은 독립운동가 차림의 시인인지 도라지인지 하는 작자가 늦어서 송구하다며 느릿느릿 들어와 앉을 자리가 없어 보이지만 자신은 바닥에 앉는 게 익숙하고 괜찮다며 가부좌를 하더니 손바닥으로 바닥을 쓸어보고 자기 집보다 깨끗하다고 좋아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까 백변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생 만날 일 없는, 아니 적어도 자신의 삶 근처에서는 구경하기 어려울 게 확실한 사람들을 여기 다 모아놓은 것 같다고. 그런 사람들이 유감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은 맞지만 그래도 평소 얼굴 보기 힘들었는데 이렇게라도 다 모일 자리가 생겨 반갑고 좋다는 따위의 얘기를 나누며 몇몇 민머리들을 더듬어보거나 색안경을 바꿔 써보거나 그러면서 깔깔거리는 모습을 보다 보니 백변은 속이 뜨거워져 오랜 변호사 생활로 단련된 차고 견고한 평정심의 벽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감촉을 느꼈다. “여러분. 오늘 혹시 뭐 빨고 왔어요?” 실내가 차게 가라앉았다. 눈알을 도록도록 굴리며 백변의 섬뜩한 표정과 아직 웃음기를 다 거두지 못하고 어색하게 굳어버린 한반도 한약 연구회 친구들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던 부엉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혹시 뭐 빨고 온 친구는 없지?” 백변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숙였는데 시인인지 도라지인지 하는 친구가 손을 들어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아직 많이 남아서……. 어라, 저 지금 혹시 자수한 거 아니죠? 여기선 솔직히 말해도 안 잡아가죠?” 백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벌어져있는 입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다물었다. 달군 바람이 코로 빠져나오는데 숨과 목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니,”로 말문을 열며 백변은 이 걷잡을 수 없는 열이 식은 용암처럼 굳어 다시 평정심의 벽이 되어줄 때까지 절절 끓는 말을 엎지르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정신을 못 차렸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인간은 살기 어렵다, 인간은 정신이 없이는 살기 어려운 동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신이 없이는 사는 의미도 없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지금 살아남기 어려운 동물들인 것이다,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아느냐, 내가 괜히 물어본 것 같다, 여러분은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지 못한다, 상황은 지금 아주 심각하다, 정신 차려라, 심각해져라, 나는 여러분이 걱정되어서 그런다, 이번 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설령 정말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나 이번 사태가 평화롭게 마무리가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러분이 걱정이 된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라 나도 당황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 진지해지자, 일장 연설이 끝났을 때 백변은 문득 대학교 졸업식을 떠올렸다. 가족과 사진을 찍고 후미진 곳으로 가 학사모를 벗고 금연을 결심하며 불을 붙이던 마지막 담배가 생각났다. 이게 정말 마지막이야. 담배와 얽힌 그간의 추억과 금연 광고의 한 장면이나 백해무익의 근거가 되는 여러 의학적 사실 따위를 떠올리며 가장 깊숙이 들이마신 잿빛 연기를 허공에 토해냈다. 담배를 피운다고 개운해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금연에 성공한 사람으로서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담배 한 대 피우면 속이 다 시원해질 것 같은 갈망이 느껴졌다. “저는 어제 지리산 씨를 만나고 왔어요.”지리산은 유치장 안에서 시들어가고 있었다. 밥도 주고 물도 줬지만 조사를 한답시고 오대산이 누구냐, 다른 사람들은 또 누가 있냐, 한반도 한약 연구회라는 게 대체 뭐냐, 대마는 누구한테 팔았냐 등 질리지도 않고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형사를 마주하면 위로 보낸다고 했으니 위로 가고 있을 스마트폰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변호사 선생님. 저는 다 괜찮아요. 제가 생각 없이 마당에서 키워서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어떤 면에선 다 자업자득이죠. 그런데 저 때문에 다른 친구들까지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미쳐버릴 것 같아요.”“말했어요?” 백변이 물었다.“뭐를요?”“이름이요. 친구분들이요.”“아뇨. 행사는 재미로 상상하고 포스터만 한 번 만들어본 거지 그런 일은 없었다고 했어요. 한반도 한약 연구회도, 오대산도 다 지어낸 단체고 사람이라고요. 말하면 정상참작이니 감형이니 뭐라고 뭐라고 구슬렸는데, 아는 게 있어야 말을 하지 아는 게 없는데 뭘 어떻게 말하겠냐 둘러댔어요.” 말하다보니 목이 매여서 그런지 지리산은 억울함에 사무친 사람 같았다. “제 친구들한테까지 갈까요?”“뭐가 가요?”“수사망이요.” 지리산은 자신이 이런 단어를 쓰는 게 겸연쩍다는 듯 헛웃음을 덧붙였다.“모르겠네요. 폰이 열리면 그물을 쫙 펼쳐서 멸치 잡듯 잡아들이겠죠. 그러면 최악인 거고요. 안 열리면…… 정말 운이 좋아서 안 열리면, 어쩌면 지리산 씨 선에서 끝날지도 몰라요.”지리산은 두 손을 겹쳐 이마 앞에 모았다. “제발…… 제발 그러면 좋겠습니다.”“저도 그러면 좋겠어요. 일단 첫 재판을 잘 준비해봅시다. 유치장 수감엔 기간이 정해져 있어서 지리산 씨는 곧 교도소를 겸하는 구치소로 이감될 것 같아요. 대마 한 주 키운 초범치고는 과한 처사로 보여요. 경찰서 유치장에서 구속 수사를 하다가 곧장 교도소로 보내니까요. 이 사건을 생각보다 엄중하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네요. 어쩌겠어요. 최선을 다 할 수밖에.” 백변을 가방을 챙기고 겉옷을 입다가 물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마당에서 대마를 키운 거예요? 여기 대마 자라니까 보라고?”“솔직히 저는 괜찮을 줄 알았어요. 평소에 사람들이 봐도 뭔지 잘 모르더라고요. 그런데…… 그보다는 대마가 불쌍해서 그랬어요. 전구 불빛 말고 햇빛을 쬐고, 화분 말고 땅에 뿌리를 내리고, 선풍기 말고 세상 멀리 여기저기서 오는 바람도 쐬길 바랐어요. 해가 들면 빛을 쬐고. 비가 내리면 비를 맞고. 추우면 춥고. 그게 이유예요. 햇빛이 안 드는 실내에서 꽃을 피우려고 한 해만 관리되는 게 아니라요. 생각해보면…… 대마의 삶이라는 게 인간의 삶을 따라 닮아버렸네요. 많은 사람들이 삶을 실내에서 실내로 옮기면서 보내니까요. 최고의 결실을 맺겠다고요. 그러는 동안 삶은 사람을 지나쳐버리고요.” 백변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마 바깥 구경 시켜준다고 본인이 바깥 구경 못하게 생겼으니까.그런데 사무실에 모인 한반도 한약 연구회 회원들을 보니 백변은 생각을 달리 할 필요를 느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은 물론 아주 많은 사람들과도 생각을 달리 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이를테면 대마는 불법이고 마약이라니까 관심도 갖지 않고 대마 이름만 들어도 인상을 찌푸리며 손사래를 치고 법을 준수하는 대다수의 선량한 시민들과는 몹시 다른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이해하려고 하고 이들이 잘 모르는 건 나무랄 게 아니라 친절히 가르쳐주어야 자신의 정신적인 편안함은 물론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백변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고 쾌활하게 말했다. “여러분. 제가 좋은 생각이 났어요.” 백변은 프린터에서 A4 한 장과 연필꽂이에서 펜 하나를 꺼내 풀죽은 한한연 회원들에게 내밀었다. “안 열리면 좋겠지만 지리산 씨 폰이 열릴 수도 있잖아요. 우린 그 상황에 대비를 해야만 해요. 그래서 말인데 여기 조직도를 좀 그려보실까요?” 풉. 상황의 심각성과 진지한 정도를 무겁게 느끼고 있었지만 그와는 무관하게 조직도라는 말이 우스워서 촉촉하게 맞물린 입술 사이로 침을 버무린 바람을 무심코 놓쳐버린 은행이 머쓱하다는 듯 물었다. “조직도요?”“네. 누가 누구랑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지, 다시 말해 대마초를 어느 분이 기르고 어느 분과 나누는지 그 경로를 알아보기 쉽게 그려보자는 거예요. 그래야 불똥이 튀었을 때 어디로 번질지 예측해볼 수 있잖아요.” 조금 속상한 목소리로 백변이 부연하는 동안 한한연 친구들은 눈빛을 교환하며 누군가 나서서 펜과 종이를 잡아주길 바랐다.“그럼…… 일단 이름부터 써볼까?” 어쩐지 좀 민망해서 괜히 까슬한 머리를 쓸다가 남산은 펜을 잡았다. 남산, 지리산, 오대산, 비둘, 은행, 구리, 오소, 부엉, 벌, 범, 거북, 삽살, 도라지, 마늘, 라니, 족제, 수달, 대파, 사루……, 남산은 고개를 돌려 누가 왔나 살피고 적고 먼 곳을 보며 입술을 오물거리며 누가 안 왔는지 생각해서 적었다.“이건 이름만 쓰는 거지 조직도라 할 수 없잖아.” 구리가 지적했다.“그럼 어떡해. 우리가 두령이나 졸개가 있는 건 아니잖아.” 남산이 일리 있게 반박하자 몇몇이 웃다가 급히 거두고 심각한 얼굴을 만들었다.“대충 한반도를 그려. 그리고 사는 위치에 이름을 쓰고 이름끼리 연결하면 되잖아.” 범이 말하자 몇몇이 오나 와 소리로 감탄하다 급히 거두고 눈썹을 구부려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나 그림 잘 못 그리는데…….” 남산이 그리기도 전에 변명하며 한반도를 그리기 시작했다.“북쪽은 필요 없잖아. 자르고 남쪽만 확대해.” 도라지가 느릿느릿 말했다.“이건 확대 기능 없어. 넌 조용히 좀 하고 있어.” 남산이 한 장만 더 달라고 하려고 백변을 보기가 무섭게 백변이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그냥 거기다 하세요. 괜찮아요.”남산은 38선을 긋고 서울의 위치에 남산을 적고 강원도에 오대산을 적고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사이에 지리산을 적었다. 범은 서울, 벌은 강원도, 비둘은 전라도, 족제는 충청도, 거북은 부산, 삽살은 제주도, 은행은 서울, 부엉은 서울, 도라지는 강원도……. 기억이 나는 대로 쓰고 이사 간 친구는 여기서 저기로 옮겨주며 나중의 집들이를 약속하다가 모처럼 모였는데 대마초를 못 피울 생각에 속상해지기도 했고, 네가 어디 살더라, 걔가 어디 살더라 어색하게 물어보며 어디 사는지 몰랐던 친구의 거주지를 알아가는 동안 한한연 명단이 한반도에 쓰였다. “선은 어떻게 긋지?” 이름을 다 쓰고 멈춘 남산이 물었다.“평소에 씨나 꽃 품앗이하는 사이끼리 선을 긋는 건 어때?” 부엉의 제안에 다들 그럴싸하다는 듯 끄덕거렸고비좁은 서울의 안쪽을 오가느라까맣게 물러 구멍 나던 속을 뚫고 나온 한 줄기의 선이강도 흐르고수풀도 자라는 산을 가로질러바다 끝에 선 부산으로 이어지고창원도 가고 밀양도 가고 안동도 가보고사람이 산을 밀어내고 길을 놓았든길이 없다고 말하는 곳이든 돌아가는 길이라고 말하는 곳이든상관없다는 듯 이 짐승에서 저 짐승에게로저 짐승에서 그 나무에게로그 꽃에게로평창과 함양과 산청과 남원과 진해와 진주와 경주와 춘천과 괴산과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만큼 서로 다른 꿈을 꾸게 이끄는 이름들의 사이사이를 단호하게 가로지르며 잇고 기우느라어디서 시작되는지 알 수 없고어떻게 끝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는산과식물과 동물을연결하는 선. 오직연결만을 알아볼 수 있는시커먼 낙서 같은 지도를 앞에 두고 백변은 화가 나지 않았다.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제가 잘못 생각했네요.” 생각한대로 말하며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지만 불쾌하지만은 않은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백변은 대마초나 흡연이든 요리든 관련 장비나 뭐든 정리하길 다시 한 번 당부하며 첫 번째 재판 일자가 정해지면 말씀드리겠다고 덧붙였다. “그럼 오대산 씨에 관해서인데요. 제가 좀 생각을 해봤거든요…….”돌아오지 말아라. 지리산이 지어낸 인물이라고 둘러댔다고 한다. 너는 지어낸 인물이니까 실제로 존재하는 네가 나타나면 안 된다. 적어도 재판이 다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거기 있으면 좋겠다. 암스테르담에 있으면 좋을 것이 아니냐. 변호사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보고 있다. 그러니 너도 레지던스에서 할 일 하고 돌아온다고 생각하면 된다. 메일의 대부분을 이루는 걱정과 위로의 말을 걷어내면 알맹이는 이와 같았다. 오대산은 랩탑을 덮으며 한숨을 빼내고 이마를 책상에 붙였다. 속편한 소리 하고 있네. 남산이 모르는 게 몇 가지 있었다. 하나는 레지던스에서의 일정이 총 한 달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다들 알고 있었을 테지만 정신이 없어서 생각도 짧아졌겠지. 지리산이 감옥에 갇히고 재판을 받는데 암스테르담에 간 친구는 그냥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 눌러앉아 대마초나 피우다 오면 만사형통이라 생각했겠지. 세상에 그것만큼 쉽고 편하면서 행복하기까지 한 임무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사태가 한 달 안에 정리되지 않는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오대산은 벌써 국제 미아가 되어 망망대해 부표 같은 기분에 숨이 가빠왔다. 다른 수를 미리 생각해두어야만 했다. 돌아가는 항공편 예약을 취소하며 오대산은 다른 수를 생각해보았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토할 것처럼 괴로워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평소 같았다면 조인트 하나를 피우고 압도적인 절망과 무기력을 연기로 좀 희석시켜서 당면한 상황을 바로 볼 수 있는 힘을 얻을 텐데 오대산은 그러지 않았다. 남산이 모르는 다른 하나의 속사정은 자신이 암스테르담에 있는 게 즐겁기는커녕 지독하게 외롭다는 것이었다. 제이드처럼 풍성한 머리칼을 꼬불거리게 파마하고 살갗을 그을린 작가와 책날개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흰 수염 탈모 안경 작가와 춥지도 않은지 어깨가 드러난 니트를 입은 제이드가 정원에서 조인트를 피우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막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놀라운 기쁨을 주던 길거리에서 풍기는 진한 대마초 향기에는 이제 진한 슬픔이 배어있었다. 기세 좋게 제이드 앞에서 귀하게 키워내고 말려 갈은 삼의 꽃으로 말은 조인트를 짓이기긴 했지만 오대산은 이튿날 아침 엉망진창인 기분 속에서 이를 절실하게 후회하며 가까운 커피숍을 찾았다. 마음 같아서는 매대 건너편에서 수심에 잠긴 동양인 여자애를 경계하면서도 조금은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수염은 많이 나지만 머리숱을 잃어가는 거대한 백인 젊은이에게 지금의 마음을 다 털어놓고 싶었다. 나는 한국에서 왔는데, 북쪽은 아니고, 한국의 남쪽에서 아니, 남쪽의 한국에서 왔는데, 그 나라는 대마를 무서워하고 증오하는 풍습이 있지만 나는 대마를 피우고 사랑하고 키우고 수확하고 말리고 대마를 사랑하는 친구들과 나누며 연기 속에서 많이 웃자는 마음으로 꽤나 오랜 시간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나 얼마 전 고향의 친구 중 한 명이 대마를 기르다가 경찰에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 사실을 알고 나니까 평소 같았으면 마음이 불안하거나 울적하거나 괴로울 때 고민할 것도 없이 대마초를 찾아 피웠겠지만 마침 친구가 경찰에 잡힌 이유가 대마초다보니까 마음 한구석이 석연찮은 이유로 대마초를 참고 참다가 참지 못하고 이렇게 커피숍을 찾게 되었다. 이렇게 마음이 불안하기도 하고 괴롭기도 할 때 추천해줄 종자(Strain)가 있을까? 물어봐서 대마초를 너무나도 많이 피우고 기르면서 전문가 중의 전문가가 된 백인 젊은이로부터 ‘아, 그럴 땐 딱 이게 좋지.’라는 대답과 함께 워터멜론이나 걸스카우트 쿠키 같은 것을 추천받아 테이블에 앉고 조인트 하나를 말아 시원하게 피워버려서 잠시만이라도 마음의 두 눈을 팽팽히 조이고 있는 나사를 완전히 풀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오대산은 그냥 마음이 울적하니까 사티바 스트레인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레몬 헤이즈 조인트 하나를 사서 한적한 공원 벤치로 가 불을 붙였다. 햇빛 속으로 흩어지는 연기를 보는데 웬 경찰 두 명의 발자국이 오대산을 향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어서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을 오대산은 자문하며 괴로워했다. ‘설마 인터폴인가?’ 물론 두 경찰은 오대산을 지나쳐 한가롭게 아침 햇살을 즐기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어느 홈리스를 붙잡아 쾌적하고 위생적인 공원에서 옮기는 고생스럽고 양심의 가책이 만만찮은 매일의 공공업무를 수행할 뿐이었지만 요동치기 시작한 오대산의 심장은 벌떡이며 온갖 괴로운 상상에 핏물을 넣어 뛰게 했다. 남산이 체포되었나? 결국 내가 실존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낸 건가? 오대산이 초조하게 조인트를 벤치에 비벼 끄고 플라스틱통에 담아 레지던스로 돌아오는 동안 상당히 많은 경찰들이 괜히 골목 어귀에 서 있거나, 동료와 담소를 나누고 있거나, 운전석에 앉아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무사히 자신의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 이불까지 덮었는데도 불구하고 멀리서 들리는 사이렌은 정확히 오대산을 향해 다가오다가 이번에는 봐준다는 식으로 멀어졌고 대마초가 예민하게 다듬어준 청력은 주변의 모든 발걸음에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다 지쳐가고 있었다. 오대산은 마음이 너무 좋지 않아 괴로워하다 아까 남긴 조인트에 생각이 미쳤다. 오대산은 탄 냄새가 밴 조인트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가 이것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들이마시면 지금과 같은 불안이 증폭될 거라는 불안 때문에 찢어서 휴지통에 버리고 말았다. 싱싱한 대마초를 찢어서 버리다니.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것도 두 번이나! 오대산은 충격에 빠져 휴지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오대산은 대마초를 피울 수 없었다. 이른 아침의 빵가게보다 유혹적이던 대마초 냄새는 이제 세상을 슬픈 모습으로 색칠할 뿐이었다. 마치 움직이지 못하는 다리에서 구더기 몇 마리가 꿈틀거리지만 개의치 않고 사람을 향해 여전히 웃는 얼굴로 헐떡이며 혀를 보이는 개를 바라보는 것처럼 거리의 커피숍들은 슬프고 슬펐다. 만일 자신이 특정되어 수사 대상이라면? 그래서 마침내 귀국을 했는데 공항에서 낚아채 소변과 머리카락을 가져가 머리카락을 이루는 다양한 구성 성분 중에서 집요하게 THC를 찾아낸다면? 끝난 줄 알았던 일이 자신의 불찰로 재점화되어 한한연 전체로 번져나간다면? 아무것도 하기 싫고 할 수도 없어 자려고 눈을 감으면 가지각색의 끔찍한 상상이 구체적으로 펼쳐졌다. 불면증으로 인해 밤에도 아침에도 한낮에도 곤두선 정신이 비명을 짖어대면 자연히 대마 생각이 나는 자신이 괴롭고 미웠다. 특히 거리만 나가도 끝내주는 불면증 및 우울증 특효약을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사듯이 살 수 있는 이곳이 끔찍했다. 걔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마당에서 대마를 키운 거야. 감옥에서 누구보다 고통스러울 친구를 향한 원망의 말이 속에서 메아리 칠 때면 자신이 너무 보잘것없는 인간 같았다. 왜 그랬어! 대체왜? 그건 지리산이 자신에게 묻는 물음이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나는 어쩌자고 대마를 마당에서 키웠을까. 백변에게 말했던 것처럼 빛과 바람과 비를 맞지 못하는 한해살이 식물의 삶이 안타까워서였지만 그렇다면 하필 왜 그것이 안타까웠을까. 그건 아마도 걸어보지 못한 세상의 온갖 구석을 걸어 다니며 음악을 짓고 연주하는 삶을 꿈꾸다가 대학을 졸업했지만 집과 사무실을 열차로 오가는 삶의 흔들리는 한가운데서 눈을 감고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으로 귀를 마비시키며 자신이 꿈꾸던 것이 햇빛과 비와 바람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일이 끝나고 집에 녹초가 되어 앉아 있으면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냉장고에 쟁여놓은 세계 각지에서 왔다는 네 캔에 만 원짜리 수입 맥주를 따서 감자칩, 과자, 치킨, 햄버거, 전자레인지의 침침한 빛 속에서 돌고 돌아가다 터질 듯이 뜨거워진 냉동 만두 따위를 곁들여 마시다 인간의 슬픔, 인간의 기쁨, 인간의 불행, 인간의 행복을 다루는 가지각색 드라마를 켜두고 알람에 화들짝 깨어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용기를 내어 찾은 정신과 병원의 약을 삼키고, 자신과 무관하게 저들의 삶을 자동 재생하다가 굳어버린 드라마를 덮어버리고, 스스로의 살과 뼈를 이미 지나치게 겹친 각양각색의 수많은 살과 뼈 사이에 자신 몫의 살과 뼈를 밀어 넣고, 간신히 문을 닫고 출렁이는 뱃속의 술처럼 흔들리는 사람들을 끌고 어두운 굴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열차 안에서 다시 두 눈을 감아야만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햇빛. 비. 바람. 적어도 그런 것이 있는 곳. 그런 것이 있어서 그런 것에 기대어 있다고 믿을 수 있는 느낌. 죽지 않으면 더는 살아갈 수 없겠다 비명 지르는 삶이 가여워, 좋아, 그러자, 더는 이어질 수 없게 삶을 멈춰 세우는 방법 따위를 구글에서 찾고 찾다가 대마초가 우울증에 좋다는 저널을 읽게 되고, 구하는 경로를 찾아 딥웹에 접속하고, 밤의 서울 골목골목을 겁에 질린 고양이처럼 살피며 에어컨 실외기 밑이나 가스계량기 안쪽에 손을 밀어 넣고, 결국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연기를 들이쉬고 내쉴 때가 되어서야 풀려버리던 낙담으로 금이 갈듯 꽉 물고 있던 어금니. 그게 변화의 시작이었다. 풀려버리는 어금니. 세상을 살아가도 좋을 이유가 되어주던 대마초는 살아도 좋을 다른 이유들을 찾아주었고, 물을 마신 녹초가 줄기를 일으켜 빛을 향해 잎을 펼치듯 지리산은 서울에서 뿌리를 거두고 지리산에 심었다. 가자. 지리산으로. 나는 풀 냄새가 나는 곳에서 살아갈 거야. 지리산은 자신과 같은 파란색의 명찰을 단 수형복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감방으로 들어가 자신의 자리라는 곳에 앉아서 생각했다. 햇빛. 비. 바람. 그게 이유였지. 사람은 그런 게 있는 세상에서만 살 수 있는 동물이니까.“여기선 다 삼촌이에요. 이웃 삼촌인 거지. 근데 딱 봐도 동생이니까 동생이라고 부를게요. 알았지? 너무 괴로워 말아, 동생.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야. 동생은 뭘로 왔어?”“저는 대마로 왔어요.”“몇 번짼데?”“처음인데요.”“대마 초범이 여길 온다고? 키우셨나?”“네. 한 주.”“한 주 키우다가 걸렸다고? 왜? 어쩌다가? 누가 찔렀나?”“네. 그렇기는 한데 마당에서 키웠어요.”“아이구. 마당에서? 왜? 아니, 그래도 그렇지. 고작 한 주 키우다 걸린 초범이 여기를 와? 해도 해도 너무하네. 그 풀떼기가 뭐라고.”“삼촌은 뭘로 오셨는데요?”“난 뽕이지, 뭐. 왔다갔다 몇 번 했어.”가만 얘기를 듣던 다른 삼촌이 말했다. “오늘 동생도 새로 들어왔는데 닭도리탕 어때요?” 다들 끄덕였다. “그럼 한 사람당 두 장씩 좀 줘봐요.” 다들 각자의 꾸러미에서 우표를 꺼내 두 장을 뜯어 내밀었다. 닭도리탕을 만들겠다고 우표를 걷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까 지리산은 자신이 감옥에 가는 꿈을 어설프게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꿈에서 깨면 마당에는 ‘지리산’이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괜찮아. 악몽을 꿨나봐?’ 윙크하는 것처럼 흔들흔들 바람을 타고 있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없다. 점심 전에 워터봉과 전지가위를 들고 남산이 도착한다. 둘은 ‘지리산’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전지가위로 밑줄기를 자른다. 통째로 부엌 천장에 매달아놓고 미리 수확하여 말리던 가지를 가져온다. 신문지를 깔고 큰 가지에서 꽃을 잘라내고, 꽃에서 잔가지를 잘라내고 다듬는다. 두 송이 정도는 급한대로 오븐에 넣어 물기를 말린다. 여전히 좀 촉촉하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향긋하고 끈적한 꽃을 갈아 선물로 가져온 워터봉에 담는다. 좋은 날이니 물 대신 오미자청과 섞은 찬 물을 봉에 따른다. 불을 붙이면서 부글부글 새콤하게 붉은 물이 전율하며 초록 유리의 안쪽에서 크림색 연기가 가득 차오른다. 지리산도 남산도 웃어댄다. 점점 꽃을 손질하는 손놀림이 둔해진다. 쉬었다 할까? 둘은 잔다. 지리산은 그런 꿈을 꾸면서도 삼촌이 모은 우표를 문 너머에서 뜨거운 물이 들은 통을 주는 다른 재소자에게 건네며 “저녁에 한 통 더 줘.”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삼촌은 받은 물을 방 끝의 화장실이라기보다 그저 변기가 잘 보이는 바닥 주변에 두며 “생활용수는 화장실에 둔다”고 말했다. 그 삼촌이 셰프 삼촌이었다. 셰프 삼촌에 따르면 형무소에선 각 방마다 전문가가 생기게 마련이며,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무료 법률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야매 변호사, 각종 생활용품 제작을 도맡는 야매 맥가이버, 야매 의사 등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 방 의사는 야매가 아니야. 의대 나왔대. 진짜 의사인 거지.” 방의 구석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의사 삼촌이 눈을 뜨더니 희미하게 목례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의사 삼촌도 여기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이런 데는 처음이라 힘이 없다고 했다. 그날 저녁, 셰프 삼촌은 요리용 쓰레기통에 뜨거운 물과 영치금으로 샀다는 닭과 라면 스프와 온갖 것을 부어 뚜껑을 덮고 모포로 말고 다시 모포로 덮은 뒤에 또다시 모포로 묶었다. 나중에 열었을 때 놀랍게도 그것은 제법 그럴싸한 닭도리탕이 돼있었지만 입맛이 없는 지리산은 몇 숟갈 뜨며 감탄사만 간혹 섞을 뿐이었다. 지리산의 사정을 들은 변호사 삼촌은 닭 뼈를 깨끗이 발라내며 1년의 집행유예와 2년의 보호관찰 판결이 유력하다면서 긍정적인 전망의 힘으로 지리산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 법률 상담이 준 용기 때문인지 지리산은 낙관적으로 형무소에 적응해나갔다. ‘그래. 이럴 때가 아니면 내가 또 언제 감방 구경을 해보겠어.’ 맥가이버 삼촌이 밥풀과 빅파이 상자로 만들어준 무릎 책상에 영치금으로 구매한 KPI(Korea Prison Industry) 공책을 눕히고 그날그날의 일기를 써나갔다. ‘월요일이 좋다. 운동을 하면 땀도 흘리고 숨도 쉬고 몸이 가진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 ‘오늘은 A4용지와 밥풀로 방 도배를 했다. 실내가 팽팽하고 환하다.’, ‘의사 삼촌은 기 치료가 전문이라는데 기로 치료하는 건지, 기를 치료한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내일이 재판이다. 어떤 형이든 달게 받을 수 있다. 여기서 더 지내도 나는 잘 지낼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두렵다. 그들의 고통보다도 나는 내가 죄책감에 짓눌려 숨을 쉬지 못할까 봐 두렵다. 부디 이 모든 게 일어나야 하는 순리대로 일어나게 도와주세요.’ 집에서 뿌리 뽑히던 그날의 차림으로 집으로 돌아가게 되든지 아니면 앞으로 살고 견뎌야 할 시간의 양을 알게 된 채로 감방으로 돌아가게 되든지 어느 쪽이든 결정되게 해달라고 빌면서 지리산은 잠들었다. 그저 부주의로 말미암은 처벌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친 괴로움이 친구들에게 전염되지 않기만을 바랐기 때문에 지리산은 법정에 들어서며 당황한 기색을 숨기기 어려웠다. 휑하게 비어 있었던 상상 속의 의자들에 남산, 은행, 비둘, 구리, 부엉, 벌, 범, 오소, 족제, 사루, 도라지, 삽살, 거북…… 한한연이 앉아 있었다. 그들 말고는 사람이 없다시피 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과 불화하는 그들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불거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왔단 말인가! 물론 재판 구경 좀 한다고 수사대상에 오르는 말도 안 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자신의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 너무 불안할 지경으로 떨 피우게 생기지 않았는가! 지리산의 얼굴은 판사석을 향해 있었지만 뒤편의 친구들에게 온 신경이 쏠려 검사가 뭐라고 하는지, 변호사가 뭐라고 하는지, 판사는 또 뭐라고 하는지 통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다만 오, 아, 같은 방청석의 감탄과 탄식이 재판이 흐르는 분위기를 짐작케 했다. 어쩐지 그 분위기는 긍정적으로 흘러가는 것만 같았는데, “재판 연기를 신청합니다. 결정적인 증거가 될지도 모르는 피고인의 스마트폰 포렌식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합당한 재판을 위해서라도 선고를 미뤄주시기 바랍니다.” 검사가 말을 마쳤을 때 지리산은 진짜로 시간이 멈췄나 싶어서 뒤를 돌아볼 뻔 했다. 갑자기 떨어지는 심장도 심장이었지만 방청석에서 모든 기척이 사라지니까 서늘한 침묵이 뒷덜미에 독니를 박아 넣었다. 혈류를 타고 현기증이 두개골 안쪽에서 번졌다. 휘청거리면서 지리산은 백변을 봤다. 평소 밀랍처럼 차고 미끄럽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면회를 갈 테니 그때 이야기를 나눕시다.” 백변은 속삭였고 지리산은 감방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됐냐고 삼촌들이 물었고 지리산은 마음이 풀려버리면서 몸도 같이 풀려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놓아주기로 했다. 지리산은 자신의 자리에 몸을 눕히듯이 쓰러졌다.여기선 여러 규칙이 있지만어겨선 안 되는 규칙이 하나 있어.티브이를 끄면 안 돼.왜요? 묻기 전에할머니의 마지막 몇 년이 떠올랐다. 1년인지 3년인지마지막이라 말해도 좋을 세월일지 모르겠지만 11년인지몇 년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데 마지막이라고밖엔 말할 수 없는 몇 년 동안할머니는 번쩍이는 티브이 앞에서 자고 깨고 자다 깼고다시 자면서도 리모콘을 꼭 쥐고 있었다. 핏기가 싹 가신 불빛 속에서지리산은 다만 시선을 티브이에 둘 뿐이었다. 나무도 나오고 노래도 나오고 모자도 나오고 풍선도 나오고 들어가는 법 없이 나오기만 하는 화면의 법은 아무리 요란하게 깔깔거리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울분으로 달달 끓어도 악몽을 꺼주지는 못했다. 잤다 깼다하면서 잠과 깸을 분간하기 어려웠고 아침 드라마든 아이돌이 번갈아가며 오르내리는 무대 방송이든 그 얼굴과 그 얼굴이 어디 놀러가서 밥 지어 먹는 방송이든 그 뒤편에선 늘 악몽이 펼쳐졌다. 예를 들어 중요한 소식을 전한다고 서울의 야경을 배경으로 앉은 두 양복이 온갖 기분 나쁜 얘기를 다양하게 들려주고 있노라면다음 소식입니다. 마약, 이제 더는 먼 나라 이야기라고 할 수 없게 되었는데요. 어느새 우리 사회 깊숙이 침투하여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최근 한반도 한약 연구회라는 이름의 마약조직이 대마초를 대량으로 재배하고 유통하다 적발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세히 알아보시죠. 취재기자 연결하겠습니다.한반도 한약 연구회, 이른바 한한회라는 이름의 대마초를 재배하고 유통하는 일당이 드러난 것은 지난 가을의 일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지리산 자락에 사는 지리산 씨가 본인의 집 마당에 대마를 심어 기르다가 이를 수상히 여긴 주민의 신고로 붙잡힌 건데요. 지리산 씨의 스마트폰에는 한반도 한약 연구회라는 집단의 톡방과 온갖 대마 관련 자료들이 들어있었습니다. 대마 재배법, 대마 가공법, 대마 요리법 등 대마초에 관한 정보는 물론, 회원들끼리 대마를 키우고, 나누고, 흡연하는 사진이나 동영상 등 대마 데이터가 가득했던 건데요. 경찰은 이를 토대로 한한회 일당을 추적하여 지금까지 33명을 검거하였고 수사는 여전히 진행 중인 상황입니다. 어떤 이유에선지 조금은 공격적으로 흥분한 기자의 목소리가 왕왕거리는 동안 법정의 지리산,양편으로 형사와 팔짱을 끼고 계단 끝에서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찡그리는 지리산,취조실처럼 어두운 책상에 수북이 쌓인 대마 잎, 화면에 연기를 뿜으며 즐거워하는 블러 처리된 오대산,모자이크되어 춤추는 스눕독,초록 모포에 눕힌파이프, 봉, 그라인더, 재배 등, 재배 텐트, 대마 화분 등등 증거품 목록 따위가 지나가고마삼근 경찰총장: 전국 각지에 흩어진 여러 재배 시설을 습격하여 총 20kg에 달하는 대마초와 각종 장비를 압수했습니다. 이는 약 200만 명이 동시 투약할 수 있는 양이며 아직도 수사는 이어지고 있는 단계여서 그 규모가 얼마나 클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경찰은 철저하고 집요한 수사로 한한회 일당을 발본색원하여 일망타진할 것을 국민 여러분께 약속드리는 바이며형사 둘과 팔짱 낀 지리산에게 누가 물어본다. 국민께 하고 싶은 말 없으십니까?지리산은 하고 싶은 말을 생각한다. 생각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말도 나오지 않는 고통. 속이 썩어 들어가느라 빈틈없이 부어오른 마음.한 번의 호흡도 드나들 자리가 남지 않아서고름을 빼내듯이지리산: 하아아…….(한숨)죄송하다는 말 한 마디 없이 한숨만 쉬네요. 인면수심이 아닐 수가 없는데요. 대마초 전문가 의학박사 차판석 박사님을 모셨습니다. 박사님. 이게 지금 얼마나 심각한 상황일까요?차판석 의학박사(Sellingstone University 졸): 대마초를 갈아 말은 궐련을 3개비만 연속으로 피워도 인간은 사망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마초는 이로도 모자라서 더 강한 자극을 찾는 욕구를 부추기는데요. 필로폰이나 헤로인 같은 약을 찾게 만들어 중독시킵니다. 이를 관문효과라고 하는데 대마를 게이트웨이 드럭(Gateway Drug)이라 부르는 이유이고 또한제발.제발 그만해주세요. 할 수만 있다면이것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지리산은밥도 먹지 않고 누워서 꺼지지 않는 티브이를 끄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동생. 재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워만 있으면 안 돼. 여기 다들 힘든 사람들만 있잖아.비좁은 세상이라 서로서로 영향이 간다니까?삼촌들이 걱정도 하고 짜증도 내다가 뭐라도 해봐요. 의사 삼촌에게 말했다.신체를 정화한다고 밥을 안 먹고 살다가 먹고 살다가 안 먹고 사는 의사 삼촌은나직하지만 선명한 목소리로테야타 옴 베칸제 베칸제 마하 베칸제 베칸제 랃자 사뭇가테 스와하.테야타 옴 베칸제 베칸제 마하 베칸제 베칸제 랃자 사뭇가테 스와하.테야타 옴 베칸제 베칸제 마하 베칸제 베칸제 랃자 사뭇가테 스와하.지리산은 이상하게도 소름 같은 게 끼치며 배가 따스해지는 것만 같았다. 포근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리산은 잠들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 콩콩콩.문을 두드리는 소리. 콩콩콩.문을 열면서 뺨에 닿는 서늘한 아침의 감촉.“에이, 이거 삼 맞잖아. 나 씨앗 좀 줘.”할머니가 ‘지리산’을 이모저모 살폈다. “지극정성으로 키웠네. 그냥 둬도 잘 자라는데.”“에이, 잘 모르시네. 꽃은 잘 키우려면 공이 들어요.”“그래? 그럼 나도 한 번 키워보게 씨 좀 줘봐.”“드릴 수는 있는데 걱정이 좀 되네요. 왜냐하면……”할머니는 픽 웃는다.“나도 다 알아. 예전에 내가 얼마나 많이 키웠는데. 따라와 봐.”대답하기도 전에 할머니는 파란 대문으로 나가버리고돌아보면 한한연 친구들은 온 데 간 데 없고문 너머의 아침으로 나가니 길은우글거리는 녹음 속으로 뻗고향긋한풀 냄새,고소한흙냄새,시원한 그늘,바람에 흔들리는 햇빛,온몸으로 이고 할머니는뒷짐 진 채 초가집으로 들어간다.요즘에도 이런 집이 있었네, 싶은 문을 열고할머니가 나온다. 누리끼리한그러나 분명 아름다운 옷을 입고“이거 삼으로 지어 입은 거야.” 씩 듬성듬성 치아를 보인다.“멋지다. 직접 지으신 거예요?”“그럼. 누가 옷을 지어주겠어. 직접 심고 키우고 말리고 짜는 거지.”“와. 저도 심고 키우고 말리는데.”“태우고?” 대답을 망설이는데 할머니는 대통 곰방대를 꺼낸다. 성냥을 긋는다.“옛날에는 지천에 널린 게 삼이었어. 집집마다 키우고 옷으로도 짓고 약으로도 쓰고 말려서 태우고 그랬어.”“정말 좋으셨겠어요.”“좋을 때도 있었고 안 좋을 때도 있었지. 산다는 게 어떻게 마냥 좋기만 하겠어.”뭐라 대답하면 좋을지 알 수 없이 멀리 삼이 자랄지도 모르지만 아마 한 포기도 없을 봉우리를 향해 연기를 보내는 할머니를 보고만 있는데“총각. 씨앗 좀 달라니깐.”“저 안 가져왔는데.”“거기 있잖아.” 할머니는 지리산 가슴팍의 셔츠 주머니를 가리킨다. 손을 넣어보니 호랑이 털처럼 얼룩덜룩한 무늬의 씨가 나온다. 그것은 한한연의 ‘그것’.‘그것’을 할머니께 드린다. 할머니는 씨앗을 받아두 손으로 꼭 쥐고 심장 가까이 가져간다. “그리웠어.” 할머니가 말한다.“고마워.” “저도요.고맙습니다.”라고 중얼거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던 것도 같았다.6시가 되어 이 고향 저 고향 찾는 리포터가 이번엔 감나무 과수원에서 단감도 먹고 홍시도 먹고 너무 달아서 치아 건강이 걱정된다면서 껄껄 웃는 할아버지 앞에서 울상을 짓고 있었다.주렁주렁 매달린 곶감에 묻은 하얀 가루 보이시나요? 제 눈에는 꼭 슈가파우더를 뿌린 것처럼 보이는데요. 틀린 말도 아닌 게 감이 마르면서 달콤한 성분이 맺히는 거랍니다. 하얀 모습일수록 더 군침이 돌게 보이시지요? 상한 게 아니라고 하니 안심하고 맛있게 드셔도 좋습니다. 제가 한 번 먹어볼게요!음! 오? 음~너무 맛있는데요. 이 맛을 뭐라고 해야 할까요? 제가 이공계 출신이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감도 안 오네요. 감 많이 먹고 감 좀 꽉 잡으셔야겠네. 할머니가 깔깔 웃다가 갑자기 춤을 추고 할아버지랑 손잡은 춤은 빙글빙글 돌아가며 뽀뽀하려니까 가로막는 손바닥이고결국 못 이기는 척 찡그리며 입술과 겹쳐지는 무수한 주름인데대마 때문에 감옥에 왔는데도대마 때문에 친구들도 올지 모르는데도대마 때문에 재밌는 상상이 감방에서 자라난다.풀이 자라듯이라는 이름의 농장 현판 아래메꽃 아치를 걷는 리포터가 깊이 숨을 마시며아니? 이 냄새는? 허둥지둥 뛰쳐나간다.거짓말처럼 펼쳐지는 삼밭에 바람이 분다. 짙은 초록의 향기가 꿈처럼 물결친다. 아니, 이게 다 뭐예요?블루 드림.이게 다 블루 드림이에요?그럼.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블루 드림.그럼 쩌기부터 쩌어기까지는요?그건 나중에 얘기해드릴게. 일단 오셨는데 맛부터 보셔야지요?오자마자 연기를 먹이시려는 푸근한 시골 인심에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요. 이 은빛 양푼이에 가득 쌓인 꽃송이들 보이시나요? 눈이라도 내린 것처럼 하얀 가루들도 보이시지요? 바로 대마의 취기를 결정짓는 트라이콤인데요! 잘 성숙한 꽃일수록 이렇게 사상체(Trichome)가 빈틈없이 끈적하게 맺힌다고 해요. 유리병 안에서 오래 숙성시켜서 꺼내면 향과 맛도 더 좋다고 하는데 제가 한 번 손을 넣어볼게요. 와! 제 손이 지금 대마 꽃송이에 파묻혀있어요. 저는 제 손이 되고 싶네요.이거 가지고 뭐 그렇게 호들갑이시람. 그냥 양푼이로 한 번 퍼온 건데.저 그럼 퍼온 곳에 가서 누워 봐도 돼요?아, 지금은 안 돼요. 별로 없어. 다 수확하면 그때 다시 와요.정말요? 약속이에요.별로 없다는 꽃송이를 한 움큼 집어 큼지막한 그라인더로 갈아 쟁반에 쏟는다. 클로즈업되는 녹색 사막 위로 자욱한 연기를 뿜으며 낙타가 되어 초록 사막을 하염없이 헤매고 싶다는 리포터의 느긋해진 목소리가 깔린다. 취하셨네. 어쩐지 남산을 닮은 할아버지가 웃는다. 어쩐지 지리산을 닮은 할아버지가 사기그릇에 블루 드림과는 사뭇 다른 빛깔의 꽃을 담아온다. 이건 마고.마고? 마고가 뭐예요?우리가 전국 각지에서 모은 토종 삼으로 만든 종자예요.이름이 왜 마고예요?그건 얘기하자면 끝도 없는데, 바다 건너에선 메리제인,우리나라에선 마고.삼베 한복을 입은 뽀글머리 할머니가 찰나의 프레임으로 스쳐지나간다.마고. 안 피워볼 수 없겠죠?이건 대통대로 피워야 좋아요. 긴 건 선비들이 쓰던 거. 짧은 건 기생들이 쓰던 거. 난 짧은 게 좋아. 긴 건 연기가 먼 길 지나오느라 식어서 순해요. 짧은 건 목을 확 때려주고. 콜록콜록!각자의 대통대로 뿜어내는 연기가 콜록콜록 화면을 뒤덮고자욱한 연무 속에서 춤추는 사람들. 덩실덩실유유자적스스로가 자연인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나오는 티브이 프로에서도 밤이면 별을 보며 연기를 흘리고여기서 끝이 아니라며 맛집의 비밀재료를 양파 까듯 밝히는 티브이 프로에서도 대마초 버터를 넣어 야채를 굽고 국수를 볶고지리산은 그런 상상을 일으켜서 몸을 일으키고 일기를 쓴다. 일기를 쓰기 위해 날이 간다. 월요일에는 풀 한 포기도 살기 어려울 운동장에서 뛰었다고. 이번 월요일에도 같은 구간을 돌고 돌았다고. 그런데그래도 풀이 있더라고. 신경을 써서 뛰었는데도뛰다보면 밟더라고. 어쨌든 풀은 짓밟혀도 고개를 들더라고. 월요일이면 그걸 배우게 된다고. 어쨌든 사는 힘.어떻게든 고개를 들고볕이 드는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힘.풀이 자라듯이. 날이 가면 언젠가는풀이 자라듯이. 언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