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코리안 하이웨이』 6. 나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完)
코리안 하이웨이
Korean Highway

친구들을 위하여.
네오를 위하여.
마가를 위하여.
마고를 위하여.
메리제인을 위하여.
6. 나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이 왔습니다.”
“그 날이요?”
“네. 두 번째 재판 날이요.” 나의 아는 친구는 그가 아는 친구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또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알게 모르게 그와는 딱히 상관이 없을 등장인물들에게 이입이 되었던 모양인지 감정이 적잖이 복받친 모양이었다.
아는 친구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눈시울을 붉힌 채 너울거리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아, 물론 눈이 붉은 이유는 차오르는 눈물 때문이었고 연기는 그래, 찻물에서 피어오르는 훈김이었다.
그래, 비록 늦은 밤이었지만 아는 친구도 나도 차를 좋아해서 혹여 잠이 안 올까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차를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대홍포나 봉황단총, 동방미인 같은 우롱차는 아니었고 정산소종 같은 홍차는 더욱 아니었고 그래, 보이차였다. 생차 말고 숙차. 그래도 나중에 잘 생각을 해서 보이숙차를 마셨던 것이다. 그러니 아는 친구가 충혈된 눈으로 응시하고 있던 것은 숙우에 따라놓은 간장처럼 진한 보이숙차의 수면에서 춤추는 아름다운 훈김이었다.
그가 보고 있길래 나도 멍하니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움직임이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찻물의 수면에선 찻물의 수면에서 일어나리라 생각하는 모습보다 더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아, 그 전에 그 전날 얘기부터 해야겠네요.”
“그 전날 무슨 일이 있었나요?”
“대산이가, 아니, 오대산이 귀국했습니다.”
“재판 전날에요? 재판이 끝나기 전까지 오대산은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인물 아니었나요?”
“물론 그러기로 돼있었는데요. 하루 전인가, 이틀 전인가, 갑자기 오겠다고 해서…….”
“이틀 전이었어요. 재판 이틀 전이요. 아, 적어도 제가 아는 친구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에 따르자면 그렇다는 거예요.”
내가 아는 친구의 말을 끊으며 사실 관계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다듬으려던 내가 아는 친구가 아는 친구는 물론 자신이 아는 바 또한 그저 들은 이야기에 불과하므로 정확한 사실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준다면 고맙겠다는 듯이 겸연쩍게 부연하곤 보이차를 홀짝였다. “오늘 차 맛이 참 좋네요.”
“맞아요. 좋은 차는 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나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좌우간 이틀 전에 오대산이 갑자기 귀국의사를 밝혔다고요?”
“나 그냥 돌아갈래. 그렇게 말했다고 들었어요.” 내가 아는 친구가 아는 친구가 말했다.(지금부터 서술의 편의를 위하여 내가 아는 친구가 A, 아는 친구가 아는 친구를 B로 표기하기로 한다.)
“대뜸 그 말만 남긴 그 메일에는 목적지와 착륙 시간이 적힌 디지털 티켓 이미지가 첨부돼 있었죠. 아 물론…….”
“들은 바에 따르면요.” 내가 끼어들었다. “어차피 여기 모인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다 건너 건너들은 이야기라는 진실에 익숙하니까 괜히 들은 이야기라고 덧붙이는 수고를 좀 덜어내도 괜찮지 않을까요?”
“동의.” 한 모금 차를 넘기자마자 C가 말했다. “아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돈은 떨어져가지, 스승 두 사람 눈치도 보이지, 엄마는 왜 귀국을 안 하는 거냐고 자꾸 물어보지, 재판을 했는데 또 연기라도 되면 어떡하지, 머릿속이 어찌나 복잡하고 괴로운지.
제가 이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런지 그 오대산이라는 사람한테 이입이 돼요. 꼭 직접 겪은 일처럼 그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이렇게 가슴이 턱 막힌다니까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D가 말했다. “갑자기 온다니까 우리가,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만약에 얘 하나 잡히면 다 끝장인데.
포스터에 이름 석 자 보란 듯이 남겼잖아요. 오.대.산. 덜컥 티켓 한 장 보내고. 시간 보니까 또 출발도 얼마 안 남았어. 안 남았대요. 그렇게 들었어. 아무튼 그래서 긴급 회의가 열렸죠. 고생 많이 했고, 온다니까 마중은 나가야겠는데…….”
“와.” 찻물은 넘긴 E가 마치 그때를 회상하는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처럼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완전 생쇼야. 다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입국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오대산이 나오면 각자 배정 받은 출구로 나가서 주차장 가까이 있는 흡연실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아니, 했대요. 넌 A다. 넌 B로 나가라. 넌 C. 넌 D. 뭐하는 짓이야, 진짜. 무슨 스파이 영화도 아니고.”
“근데…… 착륙은 한 시간도 전에 했다는데……” A가 말했다.
“안 나오는 거야…….” B가 말했다.
“혹시…… 못 나오는 거 아니야? 지리산처럼……?” F가 말했다. 아는 친구들은 이야기 속 한한연 친구들처럼 입국장 자동문으로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듯 눈을 게슴츠레 좁혔다.
“어디 줄 서 있는데 누가 갑자기 어깨에 턱 손을 얹은 거지. 오대산 씨 되시죠?” D가 말했다.
“아니.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건데!” E가 허벅지를 철썩 때렸다.
“솔직히 나도, 아니 대산이도 그런 걱정을 했을 거야. 입국하는데 공항에서 붙잡히는 상상을 했을 거야. 근데 오대산은 그냥 줄 서서 심사 받고,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짐 가방 기다리다가 찾아서 끌고 나왔을 거야. 보통 원래 그 정도 걸려.”
“나왔다!” G가 나지막이 탄성을 터뜨렸다. 사람들 사이사이 흩어져있던 A나 B나 C나 D나 E나 F나 아는 친구들은 그 속삭임에 가까운 소리에 반응하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 캐리어를 끌고 자동문을 빠져나오는 까까머리 오대산을 발견한 한한연 회원이라도 된 것처럼 각자 배정 받은 게이트 출구로 흩어져 빠져나가는 상상에 잠겨 꿈꾸는 표정을 지었다. 무섭고 긴장되고 우습기도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립기도 한, 그런 꿈.
“흡연실에서 떨리는 손으로 담배 하나 피우고 있자니까 얘가, 아니 걔가, 아무튼 오대산이 들어왔어요. 들어왔대요. 머리는 빡빡이지, 얼굴부터 무슨 온몸이 다 풀이 죽어서 되게 불쌍했다는 거예요. 걔 언니는 또 그게 얼마나 안쓰러웠겠어요. 하…….” G는 그 언니, 범이라는 인물에 꽤나 감정 이입을 겪는 모양인지 찻물을 마시고 숨을 참은 채 붉은 눈에서 혹여 물이라도 흘릴까 고개를 젖혔다.
“그래서 왜 그렇게 늦게 나왔냐고, 야, 왜 이렇게 늦게 나오냐고, 퍽퍽 때려줬대요.”
“오래 걸리더라고요. 모든 게 다. 내리는 것도. 짐 찾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C가 고개를 숙이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둘이서 그러고 있으니까 못 봐주겠어서 안아줬대요.” B가 말했다.
“한 겹, 한 겹. 세 사람을 안고, 네 사람을 안고, 한 덩이가 되어가는데…….”
“그때 누가 들어왔잖아. 아니, 들어왔어요. 아니, 들어왔을지도 몰라요? 딱 봐도 오랜 비행 때문에 니코틴 금단증상으로 적잖이 고생한 얼굴의 아저씨라면 적당했겠어요. 웬 여러 남녀가 훌쩍이며 부둥켜안고 있어도 아랑곳 않고 들어와 순식간에 담배 하나를 해치워버리고 나가버릴 정도로 다급했던 아저씨요.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놓아주었고.”
공항을 빠져나갔다. 암스테르담이나 상하이나 어디든 이 세상을 덮고 있을 하늘은 하나일 텐데 다리를 건너고 도로를 달리면서 보이는 하늘과 하늘을 이루는 구름이나 빛의 색깔, 멀고 야트막한 산들이 오대산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고향에 돌아왔다고.
너를 이루는 재료들로 이루어진 장소에 도착했다고. 도착했다는 기분.
그것이 오대산이 조수석에 앉아 차창에 밀려드는 풍경을 받아내며 느끼는 감정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답답해지는 아파트와 빌딩이 만족을 모르는 종양처럼 뻗어나가는 서울의 풍경도 어째선지 아름답게 느껴졌다.
다들 여기 모여 살고 싶은 이유랄 게 있는 거겠지. 모두가 들어있다고 봐도 좋을 야경의 반짝이는 일부가 되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 이상할 정도로 온갖 곳에 덕지덕지 붙은 화면과 그 너머 광고 이미지의 힘 빠지도록 우스꽝스러운 반복을 버텨내면서. 웃음기를 잃어가면서. 웃음기를 잃어갈수록 닮아가는 얼굴들 속으로 자신의 얼굴을 끼워 맞추면서. 곧 피겠네. 지나가는 것들 사이사이 심어놓은 벚꽃나무들은 곧 꽃잎을 터뜨릴 것처럼 익어있었다.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고장 난 폰이 열리지 않고 앞으로도 고장 난 채로 남아주기를 바라는 것 말고는 그들이 머리를 모아 준비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러니 구태여 지리산을 만나겠답시고 먼 길을 운전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내일 재판에서 만나기로 돼있는데 딱히 할 말도 없으면서 뭣하러 비싼 시간을 내겠는가.
변호사야말로 시간을 파는 직업인데. 백변은 교도소를 향해 뻗어나가는 도로를 따라 서울로부터 남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여긴 벚꽃이 폈네.
별로 멀리 온 것 같지도 않은데 벚꽃과 진달래와 개나리와 이름 모르는 봄에 피는 꽃들이 도로가의 산에 붙은 불처럼 피어있었다.
k그러다 탁 트인 곳을 지날 때면 형형색색으로 여기저기 붙은 봄꽃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근사한 집들이 눈에 띄었다.
나중에 저런 데 살아도 좋겠네. 문만 열고 나와도, 아니 창밖만 봐도 기분은 좋겠네.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백변은 피식피식 고개를 저었다.
아내와 아들, 딸은 시골이라면 질색이었다. 쉬는 날 아침 비명소리에 놀라 덜 깬 정신으로 거실로 나왔을 때 천장에 바퀴벌레가 붙어있다며 겁을 먹고 속상해진 아내가 떠올랐다.
비싼 집인데 돈값을 못하네. 자신은 아마도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시골엔 벌레가 훨씬 많겠지. 바퀴벌레만 많은 서울의 집과는 다르게 이 벌레 저 벌레 아주 득실거리겠지. 벌레라면 질색인 건 가족과 마찬가지인 백변은 상상을 따라 기어온 벌레들의 모습에 잠깐 몸서리를 쳤지만 어떤 이유에선가 초등학교 과학 시간이었나 플라스틱 방충망과 채집통을 준비해서 잔디밭이나 나무 그늘로 가게 하던 여름의 매미 소리가 떠올랐다.
물끄러미 침묵을 지키며 지켜보던 다리가 많고 여러 색을 띠던 것들. 어쩐지 조금은 그 이상한 사람들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모르지. 나이를 먹고 은퇴할 때쯤 되면 자식들도 나갈 거고. 우리가 변할지도 모르지. 시골이 좋아 보이고, 조용한 게 좋아 보이고, 텃밭도 가꾸고. 상추 같은 거. 양상추나 뭐 그런 거. 키우는 게 대마는 아니어도 뭐든 키우다보면 그 사람들이 덜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지. 이번 일이나 다른 일이나 이번 일과 다른 일들로 인해 필요한 연락이나 메일이나 자료 말고 그냥 딴 생각이나 하다 보니 어느새 차는 교도소에 와 있었다.
“그냥 한 번 와 봤어요.”
투명한 차단벽 너머 지리산은 수화기로 들은 말이 의외였는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내일 재판이잖아요. 뭐가 어떻게 될지 지금으로선 뭐라 말하긴 어렵지만…….” 백변은 흐린 말의 끝이 흐려지다 흩어지는 자리를 바라보듯 허공의 어느 지점을 보다가 말했다.
“밖에는 벚꽃이 많이 피었어요. 지리산 씨가 나와서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말하고 나서 남은 침묵을 못 견디겠다는 듯 백변은 덧붙였다.
“뭐, 물론 재판이 잘 끝나야 그럴 수 있겠지만요. 그러려면 망가진 스마트폰이 열리지 않길 바라야겠죠. 그게 열리면 벚꽃이고 뭐고 상관이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아무튼…… 내일 봐요. 법정에서요.”
지리산은 습관적으로 감사하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목이 매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지리산은 기침 몇 번을 수화기 바깥에 털어내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지리산은 감방으로 들어가며 자신이 이곳에 이렇게 오래 있으리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일 뜻대로 되지 않으면 생각도 하지 못했던 시간을 여기서 더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또한 실감했다.
그렇게 긴 시간을 살다가 보면 셰프 삼촌이 먼저 나갈지도 모르고, 어쩌면 어깨 너머로 감방 요리를 배운 자신이 셰프 삼촌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모르는 일만 내일 남아있었다. 내일 이후의 모든 내일까지 모르는 일들만이 남아있었다. 그건 아마도 지리산이 이 세상에 그냥 한 번 와본 첫 번째 오늘 이후로 언제나 그랬을 것이다. 지리산은 그걸 느꼈다.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진실은 오히려 지리산의 마음을 조금은 가뿐하게 비워주고 있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어떻게든 살려고 하겠지. “살아보려고
피웠던 대마가 저를 여기까지 데려올 줄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앞으로도 저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알 수 없겠죠.” 의사 삼촌이 말했다.
“의사 삼촌은 나가게 되면 대마 계속 피우실 건가요?” 지리산이 물었다.
“피우겠죠? 기르기도 하고? 나누기도 하겠죠?”
“이 고생을 했는데도?”
의사 삼촌은 이 모든 고생이 얼굴 위로 지나가는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어쩌겠습니까.
대마가 이 삶을 살렸으니 저도 대마를 살려보려고 하는 거죠.”
의사 삼촌은 허탈하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지리산은 법정으로 들어가 피고인석에 앉았다.
“리산이다.” M이 말했다. “지리산은 재판정으로 들어올 때 웃음을 참으려고 무지 애를 썼대요. 방청석 대부분이 휑한데 한 열에 어떤 면에선 이곳과 너무 안 어울리고, 또 어떻게 생각해보면 너무 잘 어울리는 한 무리의 친구들이 붙어 앉아서 자신이 들어오자마자,”
“리산이다.”
“리산이다.”
“리산이다.”
무슨 수풀에 부는 메아리처럼 술령거렸으니까요.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데
살이 많이 빠졌네.
머리가 무슨 밤송이 같네.
옷이 생각보다 잘 어울리네, 그런 소리 하지 마, 멍청아, 잘 생겨서 그래, 잘 생겨서.
우리가 속닥거리는 게 신경이 쓰이더래요.
재판은 지난번과 비슷했어요.
초범이고 한 주만 키웠고 유통의 증거도 없다. 그러니까
검사는 포렌식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또 뭐라뭐라 하는데
“이의 제기합니다.” 의외였어요. 정말
백변이 조금 화난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런 사람인줄 몰랐는데
대마를 기르고 피우는 죄를 지었지만
초범인데다가 유통했다는 직접적인 증거조차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랬으리라는 심증만으로 드러난 죄의 수준보다 가혹하게
체포 시점부터 지금까지 피고인은 구금돼 있다. 심지어
되는지 안 되는지, 그럴 필요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포렌식 때문에
그 기간이 연장되고 있다. 이미 갇혀 지낸 시간만 따져보아도
지은 죄에 비해 과한 처벌을 받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이 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지리산 씨는 지역 사회에서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를 막기 위해 활동가로,
노쇠한 이웃의 일손을 돕고 어린이를 가르치는 등 이웃과 어울리는 선량한 젊은이로 살아왔다.
이 사실이 대마를 기른 피고의 법적인 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자연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이 대마를 보란 듯이 텃밭에서 기른 죄와 무관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마약에 중독되어 스스로를 파괴하거나 주변에 해악을 끼치기보다 오히려
지리산 씨가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으로서 필요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면
선처를 고려해주셔야 하는 게 아닐까. 선처를 고려해달라고
백변이 화도 나고 슬프기도 한 사람처럼 말하길래
우리 중에도 눈가를 훔치거나 안경을 닦는 애가 있었던 것도 같아요.
그 와중에도 속단하기엔 이르고 두렵기도 했지만
오늘 리산이 나오겠다.
오늘 리산이 나온다고?
방금 뭐라고 했는데? 나 못 들었어.
야, 미리 김칫국 좀 마시지마, 제발.
조용히 좀 해. 판사님이 여기 쳐다보잖아.
어쨌든 우리는 슬슬 웃고 있었고
숲에 부는 시원한 바람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지리산은 또 웃음을 참으려고 애를 쓰며 속으로 말했대요.
얘들아. 제발 닥쳐.
그리고 마침내 판사가 판결문을 읽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슬픔과 기쁨을 감추기 어려웠어요.
집행유예 1년. 보호관찰 2년.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잘못을 반성하고 바르게 살기를 당부하면서 판사는
어째선지 우리와 눈을 맞추길래
혹시 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길까 봐
터져나올 것 같은 눈물을 눌러가면서
지금까지 억눌러왔던 비명을 조금만 더 가둬두면서
복도를 빠져나가고 현관을 빠져나가
그 모든 것이 빠져나가도록 풀어주었어요.
막 웃고
막 울고
막 안고
막 앉고
그러는데 지리산이 탄 호송차가 보였어요.
우리는 마치 퍼레이드 차에 따라붙는 애들처럼
달려가서 소리 질렀어요. “리산아, 축하해!”
“축하해, 리산아!”
“리산아, 축하해!”
뭐 하시던 분이냐고 물어봤대요. 교도관이
친구분들 이러시면 안 된다고 하면서
하지 마세요! 하지 마시라고!
어차피 차 안이라 안 들리는데 소리치며
손사래를 치길래 우리는 또 그게
축하한다고.
잘 되었다고.
손을 흔들어주는 줄 알고
안녕하세요.
고마워요.
안녕하세요.
고마웠어요.
손을 마주 흔들어주었어요.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였어요.” 나는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이미 깊은 밤이라 차를 마시던 아는 친구와 아는 친구가 아는 친구들은 어느새 잠에 들러 떠나고 어느 아는 친구 하나만 남아 나와 같이 차를 마셔주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됐나요?”
“교도소로 가서 체포당한 그날 아침의 차림새로 나온 지리산에게 두부를 먹여줬대요.” 아는 친구는 차를 마시고 쓰게 미소 지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대요. 축하 자리를 가지려고 하는데 되게 이상했던 거예요. 모이면 같이 대마를 피우던 친구들이었잖아요. 그런데 아무도 대마가 없어요. 있더라도 피우지 않았을 테고, 피우지 못했을 테고, 심지어 다들 대마를 피우지 않은지도 오래된 거예요. 그렇다보니 어색했던 거예요. 어디로 가지? 일단 영업하는 가까운 음식점을 찾자! 그리고 교도소 소재지 읍내에서 그 친구들 다 들어갈 수 있고, 영업도 하는 중국집을 찾아 들어갔대요.” 친구는 다만 티브이에서 그날그날 비슷한 뉴스만이 흘러나오는 적막한 중국집 실내를 둘러보는 눈빛으로 숙우에 담긴 보이차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좋은 날이니까 좋은 거 먹자 해서 메뉴판에서 비싼 걸 가리키며 전가복 돼요? 안 된대. 전복이 없대. 유산슬 돼요? 안 된대. 깐풍기 돼요? 마침 닭이 다 떨어졌대. 그래서 자장면과 탕수육만 시켜 먹는데……. 축하한다, 좋은 날이다, 고생했다, 그런 말만 나누다가 자꾸 조용해지는 거예요. 대마 얘기 없이는 이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 할 수 있는 얘기가 없는데, 우리의 좋은 기억, 괴로운 기억 모두 대마와 얽혀 있는데, 대마라는 단어를 소리 내어 발음하면 안 될 거 같았던 거죠. 그래서 무슨 고장난 자장면 시식 기계처럼 축하해, 고생했어, 괜찮아, 따위의 말만 반복하다가 이 사실이 너무 괴로워서”
한한연은 각자의 집으로 멀리 흩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지리산을 발견한 이웃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을 데리고 와 총각 왔냐고 반색하며
“왜 그런 걸로 착한 총각 잡아가냐고.
그게 뭐라고. 옛날엔 이 동네에서 집집마다 키웠는데.
나는 허벅지에 아직도 삼베 짜던 흔적이 있다고.
우리가 안다고. 좋은 총각이라고”
파출소에 가서 합심하여 따졌다며 눈시울을 붉힌다.
몸빼를 걷어 삼의 줄기가 남긴 검은 흔적을 보인다.
그랬냐고, 그러셨냐고 웃으며
지리산은 말한다. “괜찮아요,
할머니. 이제 다 괜찮아요.”
며칠 뒤 오대산은
여기야?
아니잖아.
여기야?
없잖아.
벌과 함께
가문비나무 앞을 파다가
스테인리스 김치 통을 꺼낸다.
안에는 썩은 건지 축축한 건지
역한 풀이 가득해서
풀은 다시 덮어주고
통은 설거지를 한다.
그 후로
아무도
섣불리
불을 붙이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까지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그냥 아는 사이에 지나지 않는 친구가
이 긴 이야기를 들려준 그날 밤.
나는 대마가 뭔지도 모르고
따라서 그라인더로 곱게 갈아
조인트 페이퍼로 팽팽히 말고
불을 붙여 연기를
폐의 끝까지 가두었다가
입술 밖으로 풀어주지 않았는데도
마치 뭐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에 홀려 긴 밤을 지났다.
누차 말했다시피
나는 대마를 잘 안다고
아니, 대마를 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아니, 대마를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겠지만
대마를 피우면서 대마를 부끄러워하고
대마를 몸에 깊이 스미도록 들이쉬다가도
들키기라도 하면 어떻게든 감추려다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면서 사죄하고
심지어는 자신은 잘못이 없고
대마를 기른 사람이 잘못했고
대마를 준 사람이 잘못했고
대마가 잘못이라고 말하는
인간의 뻔한 뉴스거리가 아니라
근사한 것을 보면
이것 좀 봐.
좋아하는 사람을
지금 이곳으로 부르듯이
세상에
유카라는 이름의 흰 꽃이 있고
유카라는 이름의 흰 나방이 있어서
유카는 유카에게 씨를 먹이고
유카는 유카를 수분시키며
유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유카가
피고 부화하고 지고 쓰러지는
꽃밭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들려주고 싶어지듯이
들어봐.
유카가 유카를 지키듯이
사람이 대마를 살게 하고
대마가 사람을 살게 하며
이어지는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일 수 있을까.
이전 화 : 『코리안 하이웨이』 5. 스승의 은혜
전체 연재 목록은 칼럼 카테고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Number |
Title |
등록일 |
바로가기 |
| 28 |
영화 ‘풀’ 관객 추진단 “대마를 석방하라”···대마초 비범죄화 요구 선언문 발표
2025.04.26
|
2025.04.26 | |
| 27 |
양지 부상 '대마'…프랑스, 의료용 대마 합법화 추진
2025.03.24
|
2025.03.24 | |
| 26 |
뉴욕주, 합법 마리화나 판매로 세수 1억6180만불 늘어
2025.01.29
|
2025.01.29 | |
| 25 |
"국내서 불법인데"... '이것' 女오르가즘 높여 성기능 치료?
2024.07.03
|
2024.07.03 | |
| 24 |
독일식 '대마초 합법화' …우린 안되나요?
2024.04.20
|
2024.04.20 |